수원화성은1794년(정조 18년) 2월에 착공하여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것으로, 성곽의 총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지금의화성시안녕동에융건릉을 조성하면서 그 일대에 있던수원도호부의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만든계획도시로, 화성의 축조는정조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 문신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참고하여 축조하였다. 특히 당시에거중기와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 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축성 이후 수 차례의 자연재해[7]와일제강점기,한국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으나, 축성 당시에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화성성역의궤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본래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만 등재가 가능했으나, 기록물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는 점이 인정되어 이례적으로 등재되었다. 이후화성성역의궤도조선왕조의궤의 일부로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설계도와 작업 진행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는 덕분에 현대에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한 마디로 세계기록유산인 설계도와 작업진행기록의 존재로 온전히 유지보수가 가능한 세계유산이다.
오늘날에는수원시의 상징이자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수원시의 휘장은 수원화성의서북공심돈을 형상화한 것이며, 수원을 연고로 한 축구 구단인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수원 FC의 엠블럼 역시 화성에서 따 왔다. 수원 연고의 야구 구단kt wiz의 홈구장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전광판 위에도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고 야구장 건물의 일부분[8]또한 수원화성 성벽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제10전투비행단의 정문도 이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사실 화성 건설이정조때의 기획만은 아니었고,정조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실학자로 익히 알려진유형원이 철저한 계산 하에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설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낸 바 있었다. 이 안건의 적절성이 후에 정조와 당시 노론 대신들 사이에서 검토, 수용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화성 건설 시에 유형원은 죽은 뒤에나마 이조참판을 제수받는 등 크게 찬탄받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애(1622년 ~ 1673년)와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유형원이 처음 정계에 언급된 것도 죽은 뒤인숙종때인데 말 그대로 무시당했고,영조대에 들어서야 겨우 《반계수록》의 종합적 시각이 주목받으면서 일종의 고전과 같이 주목받게 된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정조 때.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일고 있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타 지역 시민들은 수원시민들도 자주 가는 관광지라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이 많아 행궁동 카페거리 같은 곳은 조금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평일 늦은 저녁 때나 밤 늦은 때 사람 없이 조용한 성곽길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수원시민의 특권이다. 관광지로서의 목적 외에도 실제로는 생활에 밀접하게 존재하는 편이다. 빠르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데 보통 1시간 30분 컷 난다.
화성에서 보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 역시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인 기획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서애류성룡으로,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과 구조를 적고 있는데, 수원화성의 포루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대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6년 모형을 만들다 중단하였으며, 지인 김사순에게 편지를 통해 설계를 보내자 김사순이 포루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이 '전에는 이런 거 없어도 적을 잘 막았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가'하며 반발했고, 김사순은 강행하였으나 병으로 눕자 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터진 게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유형원처럼 정조 대에 재조명받거나 하진 못했지만 이외에도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훗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한번 활용해보라'고 하거나, 《설책지법》[26]에서 총포를 설치하는 형태의 목책도나 성을 고안하는 등 총포로 아군을 방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는 측근들에게 화성을 이름 그대로아름답게지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이 완공된 뒤 정조가 친히 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대동했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드는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실제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이다.《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 기사. 확실히 수원화성은 유달리 미적인 측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건축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말은 21세기에광교신도시를 지으면서 다시 거론된 적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다른 업무들이 많아 수원화성 건설을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는 수원화성 공사가 끝난 이후에야 수원성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성이 지어지지 않았음에 한탄했다. 하지만 만일 정약용의 주장대로 성을 지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당시 정약용은 수원화성 전체를 중국식 벽돌성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와 다른 대신들은 당시 조선이 벽돌 제작 및 건축 기술이 부족하고,[27]근처에 석재 광산이 발견[28]되었으니, 기존 방식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진행했다. 그러다 수원화성 공사 후반부부터 벽돌 건축 노하우가 쌓이면서 옹성이나 포루, 공심돈 등 부가적인 구조물에 한해 벽돌 위주로 지은 구조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지은 곳들은 횡력에 약한 벽돌의 특성상 후대에 무너져서 다시 쌓은 기록이 심심찮게 실록에 나온다.
수원화성을 소개하는 곳에 보면, 성문의 화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소화전인 오성지(五星池)를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 중국의 오성지를 살펴봤던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들다 보니, 실제 오성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벽돌 사용과는 반대되는 사례이다. 이 말은 정약용 본인이 공사 이후 성을 둘러보며 남긴 한탄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벽돌 사용이다.
수원화성 이후에 축성된 성은 덕진진이나초지진같은강화도에 있는돈대정도인데 훼손 정도가 심해서 성곽사 연구에 화성이 결국 그 끝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산성[29]에선남한산성,북한산성에 이은 완성형으로 보아 비교 연구하거나, 성곽 축조 양식의 마지막 단계로 연구하고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곳은 원래효종의 묫자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가(즉, 옛 수원 시가지) 철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민가들을 모두 허물고(이에 대한 대책이 바로 수원화성 건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신도시를 건설해 개발구역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것),현륭원조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수원화성의 완공되기 까지의 기간은 불과34개월로 《화성성역의궤》에 건설과정과 그림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부역으로 동원된 백성들은 이전에는 보수를 주지 않아 백성들이 부역을 피해 숨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정조는 수원화성의 축조를 위해 참여한 모든 일꾼들에게 일한 만큼의 임금을 주기로 명했고 일당을 주는 것은 물론 반나절만 일한 일꾼들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거나 일하다가 다친 사람에게도치료와 함께 일당의 50%를 지급해 줬고이로 인해 자발적으로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유례없는 폭염이 닥쳐 정조는 날이 서늘해질 때까지 수원화성 축조를 중단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부역 수당으로 생계유지를 했던 백성들은 부역을 중단하게되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지므로 정조의 말을 거역한 채 계속해서 부역에 참여했고 결국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정조는 이에 서병(暑病)[30]을 치료하는 약 '척서단' 4000정을 하사했고 이후 서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또 겨울날에 극심한 한파가 닥쳤을 때는 건설에 참여 중인 모든 이에게 털모자를 하사하라고 명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당시 털모자는정 3품 당상관 이상의 신분들만 가질 수 있는 귀한 물건으로일반 백성들이 털모자를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모자 지급을 강행해서 결국 정조의 깊은 배려에 감명받은 백성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며단 34개월만에 수원화성이 완공될 수 있었다.어떻게 보면 정조의 화성 건설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면모이기도 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499회(2012년 1월 8일 방송분, '내 마음을 하사하노라')에서도 이 과정을 배경으로 재현했다. 이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배려는 기적을 만드는구나", "이렇게 감동적인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정조를 청와대로"등 다양한 의견이 이어졌다.
수원시의 랜드마크이다보니 수원시와 관련된 것에는 꼭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수원시의 로고도 버들잎 모양의 전체 성곽 형태와 가장 높은 구조물인 서북공심돈을 나타낸 것이다.
2015년,수원시에서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지정과 동시에 약간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문인 창룡문을 비롯하여 성곽을 전반적으로 보수하는 한편 장안문 근처의 건물들의 벽을 정조와 화성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채워넣고 있다. 팔달문 쪽은 접근성 때문에[31]그런 그림을 넣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그냥 두고 있다.
수원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인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수원 FC의 엠블럼에 수원 화성 로고가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수원 FC가 1부 리그로 승격하여수원 더비가 성사되었을 때에 만든 기념 로고에는 두 구단 엠블럼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수원 화성이 로고가 되었다.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의 전광판에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KBO 리그 경기장 중에는 지역의 랜드마크를 전광판이나 백스크린에 새긴 곳이 꽤 있다.부산 사직 야구장의 전광판에는광안대교를 형상화한 네온사인이 설치됐고인천 SSG 랜더스필드전광판에는인천국제공항-인천항-인천대교를 형상화한 네온사인이 설치됐으며울산 문수 야구장백스크린에는 울산의 상징 동물 중 하나인고래를 나무로 형상화했다. 수원에서 개최된2015 KBO 올스타전로고에도 수원의 랜드마크인 화성의 이미지가 삽입되었다. 또한 이곳 4층 스카이존에 앉으면 전광판 뒤로 서장대가 보인다.
수원화성 북수문인 화홍문은 〈KOF 96〉에서 한국팀 스테이지로 쓰였다. 한국팀 BGM은 〈서울로 가자(Seoul Road)인데 정작 수원화성이 배경 스테이지인 점이 뭔가 이상하나 배경 고증과 BGM은 훌륭하다.
뜬금없지만 《삼국지연의》 기반 에로게인 〈삼극희〉에서 성을 그릴때 수원화성 디자인을 카피했다.
화성행궁
조선 시대 최대 규모의 행궁으로,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다양한 문화 행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수원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행궁’ 입니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습니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수원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습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었습니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습니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습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입니다.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입니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습니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양문(中陽門)
‘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입니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 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습니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습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壯南軒)이라고도 힙니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습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습니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습니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 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입니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광교호수공원
광교호수공원은 광교산과 원천저수지 및 신대저수지의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며 아름다운 수변공간인 어반레비와 함께 6개의 테마를 가진 둠벙으로 어우러져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담은 국내 최대의 도심속 호수공원입니다. 바닥분수인 “신비한 물너미”, “물보석 분수” 등 9개의 분수시설과 총 6.5km의 순환보행로와 도심 속 힐링 공간인 가족캠핑장,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다목적 체험장, 야외공연장, 스포츠클라이밍장, 수변 위에 5개의 원형데크와 아치형의 정다운 다리가 있는 조용한 숲, 행복한 꽃섬, 습지와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먼 섬 숲등 여러 가지 특색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IFLA(세계조경가협회)상 수상, 2014년 대한민국 경관대상을 받은 공원입니다.
수원 통닭거리
수원 통닭거리는 1970년대 초반, 좌판에 닭장을 놓고 직접 닭을 잡아 가마솥에 튀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행정 주도가 아닌 상인들이 직접 전통을 고수하고 유행을 선도한 결과 대한민국 대표 통닭거리로 성장했다. 수원 공방거리와 행리단길은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을 넘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주목받게 됐다.
수원 통닭거리, 전통의 맛에 현대적 감각 더해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수원천 남수교를 마주보는 100m 정도의 ‘수원통닭거리’는 대한민국의 대표 통닭 거리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이곳에는 수십 년간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원조 점포부터 신생 점포까지 약 13곳의 통닭집이 모여 있는데, 이들은 프라이드와 양념 통닭, 영화 ‘극한직업’으로 인기를 얻은 ‘수원왕갈비통닭’을 주메뉴로 선보이고 있다. 수원통닭거리의 역사는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좌판에 닭장을 놓고 직접 닭을 잡아 가마솥에 튀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전통의 맛을 유지해왔다. 대표적인 점포로는 ‘매향통닭’, ‘용성통닭’, ‘장안통닭’, ‘진미통닭’ 등이며, 각 점포는 저마다의 특색과 맛을 자랑한다. 특히 용성통닭은 1978년 작은 가게로 출발해 지역 안팎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곳은 수원통닭거리의 명소로 왕갈비통닭으로 유명하다. 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 외에도 왕갈비 통닭은 특유의 달콤짭짤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진미통닭’ 역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로, 가마솥에 튀긴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과 함께 닭똥집 튀김을 서비스로 제공해 방문객들의 입맛을 잡는다. 진미통닭은 옛날 방식 그대로의 맛을 고수하면서 현대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행리단길의 발전 역시 수원시의 전략적 지원이 있었다. 수원시는 이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소상공인 지원 정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또한 지역 주민들과의 협력을 통해 행리단길의 특색 있는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화성행궁이 위치한 이 지역의 인기가 상승하는 이유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유산에 있다.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또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와 공연이 열리면서 화성행궁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2023년 수원시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30% 이상이 화성행궁을 방문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공방거리와 행리단길을 찾았다. 이러한 수치는 한국 전통 건축물과 유적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얼마나 큰 매력을 끌고 있는지 보여주는 요소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독특한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공방거리와 행리단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공방거리와 행리단길의 성공적인 발전은 지역사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 공예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알릴 기회를 얻고, 지역 경제는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수원시는 이러한 지역자원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공방거리와 행리단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지역 역사와 문화, 경제를 동시에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